가.三國時代의 邊氏
세보(世譜)에 의하면 변씨는 중국춘추시대부터 시발하여 송평공(宋平公)때에 어융(御戎)의 자(字)가 자변(字邊)이었으므로 그 이름자인 변자(邊字)로 성(性)을 삼았으며 자손이 대대로 롱서(瀧西)에서 살다가 송말(宋末)에 바다를 건너 동국(東國)에 나와 황주에서 살았으니 그때부터 관향을 황주라 하기 시작하였다고 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부분의 성씨들은 연원이 불명확하여 유학자들의 사대주의 사상에서 성씨의 시조를 중국으로 삼는 일이 대부분이나 우리 성씨는 장연 변씨에서 황주 변씨 원주 변씨에 이르는 과정이 명확하고 중국에 우리 선조들의 세보(世譜)가 존재하고 그 후손 역시 중국에 많이 살고 있으므로 우리 문중은 세보에 근거하여 중국 기원설에 무게를 두고 있다.
현대 학자들중 일부는 우리 원주변씨의 중국 기원설보다는 오히려 신라시대 때부터 있던 토착 성씨(姓氏)임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우리나라의 성(姓) 중에서 삼국시대부터 있던 성씨는 손꼽을 정도이기 때문에 후손들도 이점에서 더욱 긍지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 서기 1000년경에 발행된 '백가성보(百家姓譜)'에의하면 기원전 500년전. 즉 공자가 활동하던 시기에 이미 우리 변씨는 많은 활동을하고 있고 변씨의 性質이 다재다능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농서지방에 변씨가 거주하게된 배경을 밝히고 있으므로 중국기원설이 설(說)이 아니라 명확한 근거가 있음을 알수 있다.
한편 우리나라 정사(正史)에서 기록된 사람도 삼국사기에 나오는 변품(邊品)과 변산(邊山)이다. 모두 신라통일을 전후해서 통일 위업을 달성하기위해 공헌했던 흔적을 찿을 수 있고, 신라시대 성을 가질 수 있는 계층은 중앙의 귀족이나 지방의 일부 토호에 한정되고 있었기 때문에 변품과 변산은 신라시대의 귀족이었고, 한강이북지역에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1)변품(邊品)
통일신라 전인 진평왕대에 북한산주군주로 삼국통일을 위한 싸움에서 활약
했던 신라인으로 삼국사기에 3회에 걸쳐 기록이 전한다.
-北漢山州 軍主邊品 謀椴岺城 發兵與 百濟戰 系論從軍赴敵力戰死亡(三國史記
卷4, 新羅本紀 眞平王40年條)
-新羅將軍邊品等 來功椴岺城復支系論戰死(三國史記 卷27, 百濟本紀 武王19條)
-王命系論爲金山幢主 與漢山州都督邊品與師襲槪岺城取之(三國史記 卷47, 列傳
系論)
신라본기에서는 북한산주군주로, 백제본기에서도 신라의 장군으로, 열전계론
전에는 한산주도독으로 서술되어 있다. 삼국사기의 직관지(職官志)에 의하면
군주는 문무왕때 총관(總官)이 되고 원성왕(元聖王) 원년(元年)에 도독(都督)으
로 개칭 되었다고 하나 변품의 관직은 북한산 군주가 옳은 것이다.
당시 군주는 신라시대 가장 골품(骨品)이 높은 진골(眞骨)만이 보임된 관직이
니 변품이 신라의 중앙귀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2)변산(邊山)
신라가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나라가 신라에 진주하고, 당군과의 대립
으로 예성강(禮成江) 부근에 한산주산성을 쌓을때(문무왕) 당나라와의 외교관계
를 개선하기 위하여 당나라에 파견되었던 외교관이다.
3)균여(均如)
고려태조6년(923 -973) 황주 둔대엽촌에서 그 지방의 토호이던 변말성(邊襪成)
의 아들로 태어나 화엄종의 고승이 되었다. 균여의 형 선균(善均)도 승려가 되
었고, 황주 변씨가 통일신라 전후에 활약했던 변품과 변산의 후손이라면 신라의
귀족이 지방관으로 재임한 곳이 황주지방으로 그곳에 정착한 것으로 추측된다.
나.高麗時代의 邊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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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 세종실록지리지 황주목(黃州牧)에 <村落性一邊>이라 하여 邊氏가 촌락을 이루고 살았음을 밝혀주고 있다. 황주가 변씨의 근원지이고 그 후에도 계속하여 살고 있었으니 황주를 본관으로 삼는 것은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황주를 기반으로 하는 邊氏의 활동은 고려시대에 들어와 두드러진다.
1)장연 변씨(長淵 邊氏)
시조는 변경(邊鏡). 중국 송나라 사람으로 관직에대해 여러 설이 있다. 그러나
후손 변유령이 고려 인종때 연성부원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長淵을 貫鄕으로 삼
았다.
세종 때 중추원부사를 지낸 처후(處厚),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운 사정(士貞)
등이 있다
2) 황주 변씨(黃州 邊氏)
황주는 황해도 중앙 북단에 위치하는 지명. 895년에 황주군이 되었다. 황주 변씨는
중국 농서 사람인 변려(邊呂)가 북송(北宋)이 망하자 바다를 건너 동래(東來)하여
황주에 세거(世居)하였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황주
로 하게 되었다.
황주변씨세보(黃州邊氏世譜)」에 의하면 변려(邊呂)는 1232년(고려 고종19) 몽고병
이 송경(松京)을 침입하자 강화(江華)로 피나간 고종(高宗)을 시종(侍從)하는데 공
(功)을 세워 상장군(上將軍)로 태천백(泰川伯)에 봉해지고 식읍(食邑)을 하사 받은
것으로 전한다. 가통을 지킨 대표적인 인물로는 려(呂)의 아들 윤(允)이 고려 원
종(元宗) 때 서해도 안찰사(西海道 按察使)로 원수(元帥) 김방경(金方慶)과 제주도
에서 삼별초(三別抄)를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고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에 올랐으
며, 9세손 정(靜)은 중군사정(中軍司正)을 지냈다.
조선조에 와서는 참봉(參奉) 택(澤)의 둘째 아들 이중(以中)이 임진왜란 때 소모
사(召募使)로 병마(兵馬)와 군기(軍器)를 수습했으며, 뒤에 조도사(調度使)가 되어
화차(火車) 300량)을 제조하여 순찰사(巡察使) 권율(權慄)을 도와 행주대첩(幸州大
捷)을 이루게 하였고, 함안 군수(咸安郡守)로 나갔다가 사임하고 장성(長城)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중(以中)의 맏아들 경윤(慶胤)은 광해군(光海君) 때 이조 좌랑
(吏曹佐郞)을 지내고 학행(學行)로 명성을 떨쳤으며, 폐모론(廢母論)에 대의(大意)
를 세워 반대하다가 삭직되자 두문불출( 杜門不出)하고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그밖의 인물로는 숙종(肅宗) 때 학행(學行)으로 지평(持平)에 천거된 휴(烋)와 영
조(英祖) 때 이름난 학자였던 괄이 유명했으며, 치명(致明)은 한성우윤(漢城右尹)
과 공조 판서(工曹判書)을 거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치명의 아들 득양(得
讓)은 정조(正祖) 때 예조(禮曹), 병조(兵曹), 이조(吏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한
후 보국 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올라 아버지에 이어
기로소에 들어가서 크게 명성을 떨쳤다.
3)원주 변씨(原州 邊氏)
시조 변안렬의 자(字)는 충가(忠可)이고, 호는 대은(大隱)이다. 그 선조는 황주(黃
州)사람인데 중세에 원(元)나라에 들어가 벼슬하였다. 공은 1334년(원나라 원통(元統) 연간 갑술년, 충숙왕(忠肅王) 3년)에 출생하였고 지조가 맑고 높으며 국량이 크고 넓었고 문장과 무예도 뛰어나 1351년 (지정(至正) 연간 신묘년, 충정왕(忠定王) 3년)에 무과에 장원하고 이력이 출중하여 같은 해에 형부상서(刑部尙書)로 승진하였다. 이해 겨울에 장공주(長公主, 노국대장공주)가 우리 공민왕(恭愍王)에게 시집올 때에 수행 대장으로서 모시고 왔다. 1352년(임진년, 공민왕 1년)에 왕이 외
사촌간인 판추밀(判樞密) 원의(元顗)의 딸을 아내로 삼아주고 처가의 본(本)인 원주(原州)를 본적으로 내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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